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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값 하나로 결정을 바꾸는 넛지의 힘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선택은 일어난다

서류의 체크박스가 미리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는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이 작은 초기 상태가 전체 결과를 가르는 일이 잦다. 장기 기증 동의율을 국가별로 비교한 한 연구는 그 위력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가입을 직접 신청해야 하는 나라들의 동의율은 대체로 10퍼센트대에 머문 반면,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기증자로 등록되는 나라들은 90퍼센트를 넘겼다. 문화가 비슷한 이웃 나라 사이에서도 이 격차가 그대로 나타났다.

두 집단의 국민성이 그렇게까지 다를 리는 없다. 존슨과 골드스타인의 분석이 지목한 차이는 단 하나, 서류의 기본 상태였다. 사람들은 대개 미리 정해진 값을 그대로 둔다. 기증이라는 무거운 결정조차 체크박스의 초기 상태에 좌우된다면, 사소한 선택은 말할 것도 없다.

기본값이 강한 두 가지 이유

기본값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힘이 작용한다. 하나는 설정을 바꾸는 데 드는 번거로움이고, 다른 하나는 미리 정해진 상태가 은근한 권유로 읽힌다는 점이다.

바꾸는 데 드는 수고

organ donor card

설정을 바꾸려면 어디를 눌러야 하는지 찾고, 의미를 따져보고,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단계 하나하나가 귀찮음이라는 비용으로 쌓인다. 기본값은 그 비용을 건너뛰게 해주므로, 대부분은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을 따라간다. 바꾸는 데 드는 수고가 클수록 기본값의 지배력도 함께 커진다. 한 번 더 누르게 만드는 작은 장벽만으로도 사람들의 행동은 눈에 띄게 달라진다.

암묵적 권유로 읽히는 초기 상태

미리 정해진 값은 종종 “이게 보통이고 무난한 선택”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운영자가 일부러 그렇게 둔 데에는 까닭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깔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본값을 그대로 두면,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내가 적극적으로 고른 게 아니라는 심리적 면죄부가 생긴다. 그 결과 기본값은 의무가 아닌데도 일종의 추천처럼 작동한다.

우리 주변에 박혀 있는 기본값

구독 서비스의 자동 갱신, 가입 단계에서 켜져 있는 마케팅 수신 동의, 처음부터 가장 많이 공개하도록 맞춰진 프라이버시 설정. 이들은 모두 같은 원리를 쓴다.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끄지 않는 한 유지되는 상태를, 운영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정해두는 것이다. 검색 엔진의 기본 설정이나 앱의 알림 동의처럼 한번 정해지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값일수록, 그것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그 선택지를 어떤 표현으로 감싸느냐의 문제는 프레이밍 효과와 짝을 이루며, 둘은 흔히 한 화면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연금과 저축에서 드러난 효과

기본값의 힘이 또렷이 확인된 또 다른 무대는 퇴직연금이다. 가입을 직접 신청하게 한 제도에서는 참여율이 더디게 오르지만, 입사와 동시에 자동 가입시키고 원하면 빠져나가게 한 제도에서는 참여율이 단숨에 치솟았다. 저축 비율 역시 처음 설정된 값 언저리에 오래 머문다. 처음 3퍼센트로 맞춰두면 대다수가 3퍼센트에 머물고, 6퍼센트로 맞춰두면 그 근처에 자리 잡는다. 미래를 위한 저축처럼 분명히 이로운 행동조차, 사람들은 스스로 시작하기보다 정해진 상태를 따라가는 쪽을 택한다.

저축률을 자동으로 올리는 장치

일부 제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해마다 저축률을 조금씩 자동으로 올리도록 기본 설정해 둔다. 가입자가 굳이 막지 않으면 저축 비율이 천천히 높아지므로, 미루는 성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노후 대비를 키운다. 잘 설계된 기본값은 이렇게 시간마저 우리 편으로 만든다.

설계의 권력에는 책임이 따른다

리처드 세일러와 캐스 선스타인은 선택지가 놓이는 방식 자체가 결과를 구조적으로 기울인다는 점을 들어 이를 선택 아키텍처라 불렀다. 기본값을 정하는 사람은 사실상 다수의 결정을 미리 정해두는 셈이다. 모든 선택지에는 어떤 식으로든 기본 상태가 필요하므로, 완전히 중립적인 기본값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힘을 누구의 이익을 위해 쓰느냐다.

좋은 기본값과 나쁜 기본값

같은 자동 가입이라도 누구의 이익을 향하느냐에 따라 평가는 갈린다. 저축처럼 사용자에게 이로운 행동을 기본값으로 두고 이탈을 막지 않는다면 좋은 설계다. 반면 불필요한 유료 옵션을 미리 켜두고 해지만 어렵게 만든다면, 같은 기술이 정반대 목적에 쓰인 것이다. 건강한 기본값은 사용자가 손해 보지 않을 쪽을 초기값으로 두되,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통로를 똑같이 쉽게 열어둔다. 어느 쪽인지 가르는 기준은 결국 사용자가 자기가 무엇을 고르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마음을 바꾸기가 처음만큼 쉬운가에 달려 있다. 위험이나 비용 같은 숫자를 사용자가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는 방법은 위험 소통과 자연빈도에서 더 들여다본다.